5월에나 만개해 있어 지금은 다 져 있을 법한 새하얀 산딸나무의 하얀 십자가 형상의 꽃이 활짝 펴 반가이 맞아 주는 곳이 있었습니다. 널따란 연못에 우산으로 써도 충분한 크기 일만큼 커다란 연잎들도 덩달아 함께 맞아 주었습니다. 그곳은 다름 아닌 고암 이응노 화백의 기념관과 생가가 함께 자리하고 있는 ‘이응노의 집’이었습니다.
기념관을 관람하기 전 주차장에서 ‘이응노의 집’쪽으로 향하는 넓은 잔디광장을 지나 다시 또 넓은 연못으로 먼저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유는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새하얀 산딸나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새하얀 꽃이 십자가 모양을 하고 있어 십자가 꽃으로 잘 알려진 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산딸나무로 십자가 틀을 만들어서 십자가나무라고도 전해집니다.
산딸나무란 이름은 산에서 나는 딸기나무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바로 위 사진의 모습을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이름입니다. 꽃이 진 자리에 딸기모양의 열매 보이시죠? 이런 딸기가 열리는 딸기나무인 셈입니다.
커다란 연못에 가득 차 있는 연잎과 함께 연못사이사이에 만들어 논 데크와 함께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은 또 얼마나 시원함을 안겨 주던 지요. 이제 계절이 한여름을 향하고 있다 보니 연못의 커다란 초록잎도, 데크사이의 커다란 나무들도 시원함을 안겨주는 데 커다란 몫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나무 아래 벌렁 눕고 싶을 만큼 시원함 그 자체였습니다.
연못을 한 바퀴 돌고 생가 터로 향했습니다. 생가 주변에도 소박한 야생화들이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때 이른 코스모스 한포기가 펴 있었고요, 청사초롱 밝혀드는 형상의 초롱꽃도 한 무더기 펴 있었습니다.
이응노화백은 이 곳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 홍천마을에서 태어나 열아홉 살 때까지 살았다고 합니다. 생가 터를 지나 ‘이응노의 집’ 하이라이트 기념관에 들어섰습니다. 기념관을 하이라이트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기념관이 건축설계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이응노의 집’은 도시건축 대표이고, 성균관대학교석좌 초빙교수로 있는 조성룡 님께서 설계한 작품으로 2009년 설계를 시작해 2011년 ‘이응노의 집’을 개관했고, 2013년 ‘한국건축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원로건축가 조성룡님은 마음을 다해서 ‘이응노의 집’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해서’라는 말이 주는 커다란 의미, 누구나 다 그러하듯 자신이 만들어 내는 작품에 마음을 다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이 집을 설계한 조성룡님도 마음을 다해서 설계 했을 것이고, 이 기념관의 주인공 이응노 화백께서도 역시 마음을 다해서 그림을 그렸겠지요?
마음을 다해서 그린 이응노 화백의 작품세계로 이제 들어가 볼까요? 이응노 화백의 작품세계는 크게 6번의 전환점으로 나뉠 수 있다고 하는 데요,
첫 번째 문인화시기(1924~1935) : 이응노는 처음 전통사회에 입문합니다. 초기 수업과정에서 그는 시서화에 깃든‘사의(寫意)’ 라는 개념을 터득했고 이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예술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대나무를 비롯하여 이 시기에 습득한 전통회화의 여러 주제를 유럽으로 건너간 뒤에 추상작업에 매진하면서도 꾸준히 자유분방한 붓돌림으로 다시 해석하여 끊임없이 변주합니다.
두 번째 풍경화 시기(1935~1945) :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화와 일본화를 배운 뒤, 실제 풍경을 묘사하는 ‘신남화(新南畵)‘를 주로 그렸습니다. 신남화는 일본 화가들이 일본 남화와 서양화의 방법을 섞어 고안해낸 풍경화 양식입니다. 이응노는 부지런히 세상풍경을 사생하였습니다. 전통의 울타리를 벗어나 현실의 풍경과 삶을 발견해서 기록하고 성찰하는 쪽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세 번째 반추상 풍경 인물화 시기(1945~1958) : 해방의 기쁨과 전쟁의 상처 속에서 이응노의 작품세계는 변화를 거듭합니다. 해방 이후에 사생의 원리는 유지하되, 풍경이나 길거리 등 현자의 모습을 쾌활한 붓놀림을 써서 표현합니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 작품경향을 스스로 ‘반추상’이라고 이르며, 사생을 약화하고 ‘지적의도’를 암시한다고 말했습니다. 대상을 그리면서도 화가의 흥취를 한껏 살려 그려서, 어둠침침한 50년대에 보기 드물게 생명감 넘치는 쾌활하고 율동적인 그림을 보여줍니다.
네 번째 구성연작 시기(1960~1970) : 파리 정착 초기 3~4년간에는 종이를 붙이는 ‘파피에콜레’ 기법 또는 수묵으로 낡은 돌 표면을 연상시키는 추상화 ‘사의적 추상’을 그려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60년대에 중반 이후부터 70년대에는 한자나 한글 또는 세계 곳곳의 옛 문자 형상을 재구성한 작품 ‘서예적 추상’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구성’ 이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선의 움직임과 문자의 형태, 여백의 관계 등 자신의 추상 예술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서예에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1960~70년대에는 훗날 ‘군상’의 기초 형식이 다양하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다섯 번째 옥중작(1967~1969) : 이른 바 ‘동백림사건’에 얽혀 이응노가 어이없이 2년여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시기입니다. 그는 교도소 생활이, 삶과 예술과 세계를 새로이 깨우치는 학교였다고 말합니다. 그 비좁고 밀폐된 곳에서도 부지런히 그림을 그렸으며 간장, 휴지, 밥풀, 같은 것으로 빚어 만든 작품들이나, 출소 직후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그린 너럭바위 암각화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여섯 번째 군상시기(1980년대 : 말년에 이응노는 셀수도 없이 많은 그림을 그리고 만들고 새겼습니다. 화폭안의 사람들은 서 있거나 뛰거나 걷거나 춤을 춥니다. 모여 행진하기도 합니다. 수감 생활 이후 오히려 사랑, 평화, 자유, 화해를 꿈꾸며 그는 사람을 그리고, 사람을 빚고 사람을 새긴 것입니다.
- 이응노의 작품세계 6번의 전환점 내용 출처 : 2021년 3월 28일 까지 이응노의 집 소장품 상설전 내 그림은 모두 제목을 평화라고 붙이고 싶어요 -
그리고 이응노의 집에서는 매년 5월 둘째주 토요일에 ‘전국 고암 이응노 미술대회’가 열리는데 올해로 제 19회 대회가 열렸으며 대회 입상작품은 2021.5.9~2021.6.13 까지 전시관에 전시됩니다. 그 외 각종 특별전과 개인전 및 어린이 프로그램과 청소년 프로그램, 성인대상 각종 교육 등도 진행됩니다.
기념관을 꼼꼼히 돌아보고 한옥스튜디오로 향했습니다. 한옥스튜디오는 고암학술연구사업 중심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기념관, 생가, 한옥스튜디오 뒤편으로 대숲과 쉼터가 있었는데요, 사실 저는 시설물들보다 이런 자연경관들이 더 좋았습니다. 물론 이런 시설물들과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그런 자연이기에 더 좋았던 거지요. 대숲과 쉼터에 머무는 동안 그냥 그곳에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그런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천천히 옛날 화백의 정취를, 삶을 들여다보고 자연스럽게 연계시킨 자연과도 교감하고 잔디밭에서도 잠시 멈춤 해 다시 한 번 쉼을 얻고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입구에 비치해 놓은 퀵보드와 소풍 나온 가족들의 평화로운 나들이 모습이 참으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응노의 집
-위치:충남 홍성군 홍북읍 이응노로 61-7
-문의:041-630-9232
-관람:09:00~18:00(매주 월요일 휴관/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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